2022년에 개봉한 영화 <더 배트맨(The Batman)>은 기존의 히어로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서사를 풀어갑니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 심리에 깊이 파고드는 스릴러적 요소를 강화하여 관객들에게 색다른 감정적 자극을 제공합니다. 특히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면, 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 리들러의 상징적 범죄 방식, 그리고 복수를 통해 드러나는 감정의 진폭 등이 매우 흥미롭게 해석됩니다. 기존 히어로물에서 다소 간과되던 ‘정의감 뒤에 숨겨진 불안정성’과 ‘폭력의 정당화 문제’ 등이 심도 있게 다뤄져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심리학도들이 특히 주목할 만한 세 가지 요소, 즉 ‘트라우마’, ‘상징’, ‘복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영화 <더 배트맨>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트라우마 : 배트맨의 어둠은 어디서 시작됐나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기원에는 늘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브루스 웨인이 어린 시절 부모를 눈앞에서 잃었다는 설정은 모든 배트맨 시리즈의 공통된 출발점이자, 그가 왜 밤마다 마스크를 쓰고 범죄자들을 추적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서사적 장치입니다. <더 배트맨(2022)>은 이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트라우마가 현재의 브루스에게 어떠한 심리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탄탄한 구조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고립된 삶을 살며, 대중 앞에 잘 나서지도 않고, 인간관계 또한 매우 제한적으로 유지합니다. 이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으며, 트라우마가 여전히 그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브루스는 자신을 "복수(Vengeance)"라고 부르며, 법의 테두리 밖에서 정의를 구현하려 합니다. 이는 트라우마로 인한 감정의 왜곡에서 비롯된 정체성 혼란을 반영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분열된 자아'로 설명합니다. 즉, 낮에는 웨인 가문의 상속자로서의 자신을 유지하지만,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자아, 배트맨으로 변모하여 현실의 고통을 잊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가적 존재 방식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말하는 원초아와 초자아의 충돌로 해석할 수 있으며, 브루스는 이 두 충동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트라우마는 현재 진행형의 심리적 고통이며, 배트맨이라는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상징 : 리들러의 메시지와 사회 구조
<더 배트맨>의 리들러는 기존의 빌런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담이라는 도시의 부패, 위선, 사회적 불평등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단순한 폭력이 아닌 상징과 메시지를 통해 목적을 달성합니다. 리들러의 범죄는 복수심에만 기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정의 구현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수수께끼와 퍼즐을 남길 때 관객 또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진짜 악은 누구인가?’, ‘우리는 정말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질문은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되며, 리들러는 악당이자 철학자로 기능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리들러는 융의 ‘그림자’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존재로 그의 분노는 개인적인 불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리들러는 사회가 외면한 진실을 폭로하고, 대중이 무시했던 고통을 공론화함으로써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합니다. 리들러가 선택한 피해자들은 모두 권력과 부를 가진 인물들로, 고담 사회의 부패를 상징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구조적 모순을 향한 공격이라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브루스 웨인 또한 사회적 특권층에 속하면서도 그 구조를 깨부수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리들러와 일종의 ‘거울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고독, 소외, 정의에 대한 강박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며, 외형은 다르지만 내면은 놀랍도록 유사한 심리 구조를 공유합니다. 차이라면 단지 방식의 차이일 뿐, 목적의식이나 고통의 뿌리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이 점은 관객으로 하여금 선과 악의 경계를 재고하게 만들며, 보다 복잡한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복수: 감정인가 정의인가?
<더 배트맨>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I’m vengeance(나는 복수다)”라는 배트맨의 대사입니다. 이 짧은 문장은 그가 어떤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중요한 질문을 내포합니다. 복수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인가, 아니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정당한 수단인가? 브루스는 부모의 죽음 이후, 자신이 겪은 고통을 세상과 공유하지 않고 오로지 '처단'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방식이 정말 정의로운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자신도 ‘복수자’라고 밝히는 장면은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브루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악영향을 끼쳤음을 자각하며, 복수가 정의로 환원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복수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은 다시 사회의 고통을 증가시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전이’ 또는 ‘분노의 연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억눌린 감정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타인에게로 전이되고, 결국 더 큰 사회적 문제로 비화합니다. 결국 브루스는 변화하게 됩니다. 복수자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기 시작하며,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담 시민을 구조하고 연약한 존재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더 이상 ‘공포’가 아닌 ‘희망’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영웅서사의 끝맺음이 아니라, 한 인간이 내면의 분노를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심리적 치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정체성, 감정의 통합, 그리고 자기 수용(Self-acceptance)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