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개봉한 유전(Hereditary)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심리적 공포와 가족 비극이 결합된 독특한 영화입니다. 겉으로는 공포 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불안과 상실, 그리고 가족 간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심리적 트라우마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주인공 애니와 그녀의 가족이 겪는 초자연적 사건들은 실상 심리적 현실의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가족 내부에서 억눌린 감정과 상처들이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반복되고 전이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단순한 귀신 이야기나 유령의 등장으로 공포를 자극하기보다는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 억눌린 감정, 표현되지 않은 애도와 분노를 바탕으로 깊은 심리적 불안을 형성합니다. 특히, 모성과 자녀 관계, 상실 후의 죄책감, 정신 질환의 유전 가능성 등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분석 지점을 제공합니다. 지금부터 《유전》을 세 가지 심리학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가족 간 억압과 상호작용 : 다중적 관계
중심 인물인 애니는 예술가이자 엄마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억눌림과 감정적 거리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애니의 어머니는 통제적이고 비밀스러운 인물로 묘사되며, 이로 인해 애니는 심리적 독립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자녀들과도 복잡한 감정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특히 딸 찰리는 외할머니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는 가족 내에서 대물림되는 통제와 영향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심리학의 ‘가족 체계 이론(Family Systems Theory)’에서 설명하는 삼각 관계와 유사합니다. 부모와 자녀, 조부모 사이에서 감정적 충돌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 다른 구성원이 대신 그 갈등을 짊어지며 대물림되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애니는 어머니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억압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영화 중반 애니가 그룹 테라피에서 자신의 가족력이 정신질환과 깊게 관련돼 있음을 털어놓는 장면은 가족 내 트라우마가 단절되지 않고 반복되는 방식, 즉 ‘심리적 유전’을 명확히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이처럼 유전은 가족이라는 집단 안에서 반복되는 감정의 패턴과 상호작용의 복잡함을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억눌린 감정은 세대를 넘어가며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는 씨앗이 되며, 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자율성과 안전감을 잃고 점차 붕괴되어 갑니다.
애도와 죄책감 : 상실 이후의 심리적 붕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찰리의 죽음입니다. 찰리의 사고는 단순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뒤흔드는 심리적 트리거 역할을 합니다. 찰리를 차에 태운 아들 피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여동생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며, 그 이후 극심한 죄책감과 외상후 스트레스 반응을 보입니다. 애니 또한 딸의 죽음 이후 점차 정신적으로 무너지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반응은 ‘병적 애도(Pathological Grief)’로 설명할 수 있는데, 정상적인 애도 과정이 막히고 억압된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행동화되는 현상입니다. 특히 애니는 무의식적으로 찰리의 존재를 집 안 곳곳에 유지하려 하고, 이 과정에서 죽은 자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영혼 소환’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심리학적으로 ‘부정’ 단계의 연장선이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상 속에 안주함으로써 감정적 파탄에 이르는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가족 구성원 간의 대화 단절과 감정 표현의 부재는 트라우마의 전이가 더욱 강화되도록 합니다. 애니와 피터는 찰리의 죽음 이후 서로를 원망하고 외면하며 가족 내 긴장감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영화는 애도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개인이 어떤 모습으로 심리적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죽음 이후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상실을 감당하지 못하는지를 통해 애도와 죄책감이 개인의 심리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무의식과 통제 상실 : 악마와 정신질환의 상징성
《유전》의 마지막 장면으로 갈수록 현실은 점점 무너지며,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이 초자연적 요소들—악마 파이몬의 존재, 찰리의 영혼, 그리고 마법진과 제의—은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무의식의 투사로 볼 수 있습니다. 칼 융(C.G. Jung)의 ‘그림자(Shadow)’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나 기억, 충동을 무의식에 억누르며 살아가며, 이 억눌린 요소들은 때때로 상징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됩니다. 영화에서 애니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행동하거나 자신의 몸을 해하는 장면들은 자아와 무의식 간의 경계가 붕괴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듭니다. 이러한 전개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보면 조현병 또는 분열성 장애에서 나타나는 증상들과 유사합니다. 자율적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느낌은 통제 상실감의 심리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단순한 공포 효과를 위해 초자연적 존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현실적 공포’—즉 인간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강조합니다. 유전은 이처럼 무의식의 세계가 현실에 침투할 때 일어나는 심리적 붕괴와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을 공포라는 장르적 언어로 시각화합니다. 악마는 이 영화에서 실제 존재라기보다 억눌린 공포와 상실, 분노입니다.
유전이 남기는 심리학적 메시지
《유전》은 공포 영화의 외형을 빌려 인간 심리의 가장 어두운 지점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영화는 초자연적 존재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 즉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린 감정과 트라우마의 대물림이라는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애니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통제와 비밀은 애니에게, 다시 자녀들에게 전이되며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심리적 고통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유전은 단순한 유전적 질병의 문제가 아닌 정서와 감정, 경험의 유산이라는 보다 깊은 심리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불편함은 결국 우리 자신도 이 ‘유전’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질문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은 DNA만이 아니라, 무의식 속 상처와 반응의 방식이라는 점을 이 영화는 강하게 환기시킵니다. 《유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족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 안에 잠재된 심리적 패턴을 인식하게 만드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합니다. 공포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사실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